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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 작성자 사진: 박동수 입니다.
    박동수 입니다.
  • 2022년 5월 1일
  • 7분 분량

자연과 함께 어울러진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공국은 중부 유럽서부에 있는 의회군주제형태의 민주주의국가이다. 이나라의 인구는 2021년 중반에 약 640,000명으로 기록되며, 대공국은 중부독일어 지역에 속한다. 국가언어는 룩셈부르크어이며 추가적으로 행정 및 공식언어는 표준독일어와 프랑스어이다.



역사적으로 룩셈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연방의 일부였다. 역사에 룩셈부르크 위기로 기록되는 1867년 제2차 런던 조약은 룩셈부르크 중립을 약속하면서 독일 국가 연합에서 탈퇴하였다. 1890년까지 대공국은 네덜란드 왕에 의해 연합으로 통치되었으며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동안 독일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통합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NATO, UN, 유럽연합의 창립 멤버이다.

이웃 국가인 벨기에, 네덜란드와 함께 룩셈부르크는 베네룩스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 자를란트(Saarland), 로렌(Lorraine)의 프랑스 지역, 벨기에의 왈롱(Walloon) 지역, 독일 라인란트팔츠(Rhineland-Palatinate) 주와 함께 약 110만인구의 Saar-Lor-Lux을 만든다. 이 지역은 유럽 연합 내에서 근로자들의 국가 간 이동성이 가장 높다.

룩셈부르크라는 이름은 아마도 성의 이름인 Lucilinburhuc, 나중에 Lützelburg("lützel" = "작은"; cf. 저지 독일어 및 프리지어어 "lütt", 영어 "작은"), 지어진 "작은 성"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963년에 지크프리트를 위해 당시 아르덴 백작이었던 백작이 조상의 자리로 세워졌고 그 주변에서 룩셈부르크의 수도인 도시로 발전한다. 루 실린 부르크라는 이름은 요새화 된 난간을 의미하는 "Letze"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하며 사실 가족 성은 Bockfelsen이라고 불리는 암석 노두에 있다.

이 나라는 독일 국가의 신성 로마 제국의 한 군으로 탄생하였다. 독일어권에서 Lützenburg이라 명하며 이 이름은 17세기에 사용되었으며 나중에 룩셈부르크로 대체되어, 이는 독일화 된 프랑스어 이름 형식 룩셈부르크로 불린다. 1354년에 룩셈부르크는 공국으로 인정되었다. 1815년 비엔나 회의에서 룩셈부르크 공국은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 나소-오렌지의 윌리엄 1세, 통일 네덜란드의 왕은 연합의 첫 번째 대공이 되었다. 이 연합은 1890년에 현재의 룩셈부르크-나소 왕조(공식적으로 1964년까지 나소-바일부르크라고 불림)의 즉위와 함께 종료되었다. 룩셈부르크는 이제 현존하는 마지막 대공국이다.



오늘날 룩셈부르크 지역의 첫 번째 인류의 정착 흔적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4900년경 선형 도자기 문화로 시작되며, BC 켈트족의 정착은 BC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100년 후, 로마인들은 기원전 58-51년경 카이사 때 이 나라를 침략하였다. BC는 라인강 국경까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의 일부를 정복하였으며 오늘날의 룩셈부르크 지역은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었다. 서기 5세기 사람들이 이주하던 대이동 시기에 게르만 프랑크족은 로마인들을 밀어내었다. 유람하던 수도자들은 이 지역에 최초의 수도원을 지었으며, 에히터나흐 수도원은 698년 앵글로색슨 선교사 윌리브로드에 의해 설립되었다.

프랑크 제국 내의 룩셈부르크 군

나라가 동프랑코니아 제국에 속했던 963년, 지크프리트 1세는 트리어에 있는 성 막시민 수도원과 물물교환을 통해 루실린부르크 성이 있는 알제트 계곡의 작은 복펠젠을 인수하였다. 이렇게 룩셈부르크 가문과 룩셈부르크 군은 역사에 시작이 된다.

신성 로마 제국 내의 룩셈부르크 공국

1308년 룩셈부르크의 하인리히 백작이 로마-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와 그의 아들 요한은 1310년에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고 중세 독일 제국(신성 로마 제국)에서 룩셈부르크의 권력 위치를 확립하게 된다. 1354년 카를 4세 황제에 의해 룩셈부르크 카운티가 공국으로 승격되는 순간이 된다. 첫 번째 공작이 된 벤첼 1세는 1437년 로마-독일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가 사망하면서 룩셈부르크 가문의 본선이 사라지고 제국 내 룩셈부르크인의 통치는 끝나게 된다. 1441년에 룩셈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공작부인은 그 땅을 프랑스 부르고뉴 왕가에 팔았지만 헌법상 제국의 영지로 남았다. 1477년 마지막 부르고뉴 공작 용담 공 샤를이 죽은 후, 룩셈부르크는 나머지 부르고뉴 유산과 함께 샤를의 딸 부르고뉴의 마리아와 그녀의 남편(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됨)에게 넘어가게 된다. 1482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고 1555년에는 스페인으로 주권이 빼앗긴다. 공국이 부르고뉴 왕가와 나중에 합스부르크 왕가와 연합한 이후, 둘 다 브라반트, 플랑드르 및 네덜란드를 통치했기 때문에 룩셈부르크의 역사는 북부 및 남부 네덜란드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Photo by Dan Asaki on Unsplash


1659년,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가 통치하는 스페인 왕국 사이의 피레네 조약으로 이전에 부르고뉴 왕조의 네덜란드(룩셈부르크 포함)를 지배한 스페인 왕국은 룩셈부르크의 첫 번째 분할로 이어졌다. 디덴호펜에서 몽 메디, 프랑스까지. 1684년부터 1697년까지 루이 14세의 1683/84년 재결합 전쟁의 결과로 이 나라는 완전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713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룩셈부르크는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게 함락되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다시 한번 합스부르크가 통치하는 영토가 되었으며 1795/1801년부터 1814년까지 프랑스 혁명군이 진출한 후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독일 연방 내 룩셈부르크 대공국

공국이 속한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에 해체되었으며. 라인강 좌안의 독일 지역과 마찬가지로 룩셈부르크는 나폴레옹 1세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프랑스에 함락되었다. 1815년 비엔나 의회는 현재 대공국으로 승격된 국가가 새로 설립된 독일 연방의 연방 국가가 되기로 결정하였으며 동시에, 의회의 결의안은 네덜란드 왕국과의 개별 연합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네덜란드, 나중에는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1815년부터 통일된 국가 연합을 형성하였다. 벨기에는 1830년 벨기에 혁명의 결과로 떠나게 된다. 비엔나 회의의 결의는 룩셈부르크의 두 번째 분할을 가져왔지만 실제로는 현상 유지의 불완전한 복원에 불과하였다. 옛 룩셈부르크의 일부 북부 지역은 프랑스에서 네덜란드로 직접 넘어간 반면 동쪽 지역 라인 주는 프로이센으로 넘어가게 된다. 1830년 룩셈부르크는 벨기에 혁명에 가담하여 1839년에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이 있었는데, 이 부분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서부 절반인 "프랑스어 지구"와 룩셈부르크 지방인 Arlon 및 Martelingen 시 주변 지역이 벨기에에 함락되었다. 그 이후로 모젤 프랑 코니아어를 사용하는 동쪽 절반인 "게르만 지구"만이 룩셈부르크 대공국에 남아 있게 된다. 1866년 독일 연맹이 해산될 때까지 네덜란드 왕국은 독일 연방 하원에서 룩셈부르크에 대한 강력한 투표를 행사하였다.

룩셈부르크 위기

1867년에는 룩셈부르크 위기로 역사에 소개가 되는데 그 내용은 나폴레옹 3세가 빌헬름 3세에게서 룩셈부르크를 빼앗으려 하였다. 네덜란드, 대공국과 독일 연방의 다른 지역의 국민들은 이 계획에 대해 분노하였으며. 4명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제공한 룩셈부르크 왕조의 고향 룩셈부르크가 프랑스에 함락되어서는 안 됨을 주장한다. 빌헬름 3세 대공에게 탄원서를 제출한 현재의 상태를 유지라는 항의 운동이 있었으며 그 당시 룩셈부르크의 후기 모토인 "Mir wëlle bleiwe wat mir sinn"(우리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싶습니다)라는 주장은 룩셈부르크 주민들 사이에서 높은 의견의 통합을 가진다. 위기는 1867년 두 번째 런던 조약으로 절정에 달했으며, 이 조약에서 국가는 타협으로 "영원한 중립"을 선언하게 된다. 룩셈부르크에 있는 독일 연방의 요새였던 룩셈부르크의 요새는 그 후 파괴되었다.

룩셈부르크의 완전한 독립

룩셈부르크는 네덜란드 왕 빌헬름 3세가 사망한 후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였다. 1890년 남자 측 가계의 네덜란드 왕가 Orange-Nassau의 소멸로 인해 가장 가까운 친척인 Dukes of Nassau-Weilburg가 룩셈부르크 정부를 인수하였다. 이로써 룩셈부르크는 고유한 세습 왕조를 갖게 되었고, 네덜란드에서는 오랑주 왕조의 왕위 계승자인 빌헬름 3세의 딸 빌헬미나가 계승하게 되었다. 북독일 연방과 독일 제국이 결성된 후 대공국은 1919년까지 독일 관세 동맹의 일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동안 룩셈부르크의 중립은 독일군에 의해 침해되었고, 독일군은 룩셈부르크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고 1918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룩셈부르크를 점령하였다. 1918/19년의 국가 위기를 가지는데, 전쟁 중 친 독일적 태도로 인해 대공비 마리 아델하이트(Marie Adelheid)는 국내 정치적 압력을 받고 여동생 샬럿에게 왕권을 물려주고 퇴임한다.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여성 참정권은 1919년 5월 8일 제헌의회에서 21세 이상의 룩셈부르크 국적의 모든 여성과 남성에게 투표권을 확대하기로 결정하면서 도입된다. 1919년 5월 15일에는 개정된 헌법이 발효되었다. 여성은 1919년 9월 28일 군주제 지속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처음으로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Union Économique Belgo-Luxembourgeoise는 1921년 7월 25일에 서명되어 1922년 12월 22일에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벨기에 통화와 룩셈부르크 통화 간의 1:1 환율로 적용 그때부터 벨기에 프랑은 룩셈부르크에서 지불 수단으로 인정된다.

1920년대에 노동 운동에서 등장한 Lëtzebuerger Sozialistesch Aarbechterparty(LSAP)와 자유주의자들의 지배를 점차적으로 대체한 가톨릭 지향적인 Chrëschtlech Sozial Volleksparty(LCV)와 같은 새로운 정치 흐름이 힘을 얻었다. 국가 사회주의는 알자스-로렌 및 동벨기에와 같은 룩셈부르크를 독일어를 사용하는 아리아인 인구가 있는 진정한 독일 영토로 보았으며, 1933년 1월 30일 권력을 장악한 이후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나치 정권에 의해 합병될 위기에 놓인다.

제2차 세계 대전과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룩셈부르크 점령 이전에도 룩셈부르크에는 반유대주의가 만연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민족적 포퓰리즘 운동에서 자신을 표현했지만 일간지 룩셈부르크 워트(Luxemburger Wort) 주변의 가톨릭 보수파에서도 자신을 표현하였다. 1936년부터 독일 제국의 유태인 난민에 대한 입국 요건이 강화되었으며, 뉘른베르크 법은 룩셈부르크에 거주하는 독일인이 유태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취지로 1935년 룩셈부르크에서 채택된다. 룩셈부르크로 도피한 유태인들은 별도로 의무적으로 등록되었으며 유대인들은 일자리를 찾을 때 차별을 받았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룩셈부르크를 점령하였다. 정부와 대공 작은 런던으로 망명하고, 임시 군사 행정부 이후, 이웃 Moselland 지역의 NSDAP Gauleiter인 Gustav Simon이 이끄는 민사 행정부가 수립되었다. 룩셈부르크인은 독일 국방군에 징집되어 군 복무를 했으며, 유태인 시민은 독일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2년 8월 독일은 이 지역을 합병하여 지배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젊은 국가에 대한 시험이었고 군주제와 룩셈부르크 언어와 같은 국가 상징이 룩셈부르크 사회의 의식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1944년 9월 10일 룩셈부르크는 처음으로 미군에 의해 해방되며 당시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장군 휘하의 미 3군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장군의 명령에 따라 북쪽으로 선회하여 며칠 만에 공격자들을 저지하고 후퇴시켰다. 1945년 1월 룩셈부르크는 마침내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룩셈부르크에서 유태인의 추방은 1941년 10월 16일부터 1943년 6월 17일까지 7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국제 역사가들은 룩셈부르크가 역사의 이 장을 객관적으로 다루지 않았고 룩셈부르크가 자신을 희생자로만 잘못 표현했다는 사실에 대해 룩셈부르크를 비판하였다. 룩셈부르크 역사가인 데니스 스쿠토(Denis Scuto)와 빈센트 아르투소(Vincent Artuso)가 시작한 조사에 따르면, 당시 정부 역할을 했던 룩셈부르크 행정위원회가 강제 추방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명령을 받아 이행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한 모습이다. 2015년 6월, 룩셈부르크는 이러한 비행에 대해 유대인 공동체에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룩셈부르크는 (2015년 초 현재) 수용된 자산, 부동산 및 회사를 아직 반환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보상이나 금전적 배상도 지불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통화 동맹이 복원되었고 관세 및 경제 동맹이 네덜란드(베네룩스 국가)로 확대되었다. 룩셈부르크는 1945년에 유엔의 회원국이 되었으며, 1948년에 국가는 공식적으로 1867년 이후 존재했던 "영구 중립"을 폐지하게 된다. 룩셈부르크는 1952년에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Montanunion)의 소재지가 되었다. 1957년 3월 25일에 설립된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6개 창립 회원 중 하나이다. 1985년 다른 4개 EU 국가와 체결된 솅겐 협정의 체약당사국으로 모젤에 있는 룩셈부르크 마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90년에 솅겐 시행 협정이 체결되어 1995년 3월 26일에 계약 당사자 간의 국경 통제가 폐지되었으며 솅겐 지역이 만들어지게 된다. 2002년 초에 유로는 룩셈부르크 프랑의 뒤를 이어 현금 거래의 공식 지불 수단으로 도입되어 유로는 1999년 초부터 은행거래 그리고 국가 통일된 화폐로 사용된다.

룩셈부르크의 빨강, 흰색, 파랑 삼색은 1972년부터 현재의 형태로 존재해 왔다. 대공국 국기의 파란색은 군청색인 네덜란드 국기와 달리 하늘색으로 표시된다. 2006년부터 플래그 변경이 논의되었는데, 이는 주로 이러한 혼동의 위험 때문이다. 정부가 발의한 법안 초안에 따르면 향후 룩셈부르크 영토에는 삼색기 외에 붉은 사자가 있는 문장기(Roude Léiw)가 허용될 예정이다. 이 변형은 1972년부터 룩셈부르크 선박에 사용되었으며 정부는 현재 단일 국기로의 도입을 거부하고 있다.

행정권은 대공과 정부가 행사한다. 정부는 전통적으로 국무장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총리와 15명의 장관, 3명의 국무장관으로 구성된다. 민주당(DP)의 자비에 베텔(Xavier Bettel)은 2013년 12월 4일부터 국무총리 겸 국무총리직을 맡고 있으며 그는 LSAP 및 녹색당과 함께 DP의 연합을 이끌고 있다. 국무원은 2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자문기구이다. 공천 절차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고 법률에만 규정되어 있다.

유럽연합 통계청(Eurostat)의 연구에 따르면 룩셈부르크 공국의 평균 소득은 유럽 평균 2.5배이다. 룩셈부르크 가구의 평균 재산은 570,000유로이며 외국인 거주자는 훨씬 더 부유한 경향을 가진다. 룩셈부르크 사람의 구매력 기준은 EU 평균의 253%(독일: 116%)로 아주 높은 수준이다. 리히텐슈타인과 모나코 공국을 제외하고 룩셈부르크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2009년 룩셈부르크 경제에서 생산되어 최종 소비에 사용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총가치는 1인당 USD 104,512이다. 이로서 룩셈부르크는 노르웨이 US$ 79,085, 카타르 US$ 68,872, 스위스 US$ 67,560보다 훨씬 앞서 있다. 룩셈부르크 시의 국내 총생산은 EU 평균의 213%을 차지한다. 비교하여 런던이 315%, 브뤼셀 수도권은 234% 고 룩셈부르크보다 더 높은 값을 가지고 있다. 국가의 경쟁력을 측정하는 글로벌 경쟁력 지수에서 룩셈부르크는 137개국(2017~2018년 기준) 중 19위를 기록하였다. 2017년 경제 자유지수에서 180개국 중 14위를 기록.

룩셈부르크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변화를 겪는다. 지난 20년 동안 인구는 거의 1/3이 증가하여 550,000명이 넘었으며, 주민의 40% 이상이 외국인들이다. 또한 독일, 프랑스 및 벨기에와 같은 인접 국가에서 온 약 150,000명의 "국경을 넘는 통근자"가 룩셈부르크 일자리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은행과 자금은 룩셈부르크 부의 주요 원천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며 343개 대기업과의 세제 혜택 논란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 장 클로드 융커가 룩셈부르크의 총리이자 재무장관이던 시절에도 룩셈부르크는 새로운 경제 기둥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생물 의학 분야에서 첨단 기술의 위치로 유럽의 다른 국가와의 차별을 가진다. 온라인 소매업체 아마존과 같은 기업이 룩셈부르크에 정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거에 대공국의 기업에 대한 세금 매력과 관련이 있다.

조세를 피하는 그 이상

가장 최근의 폭로 이후 룩셈부르크는 조세 피난처라는 인접국으로부터의 비난을 받는다. 대공국의 정부 및 기업 대표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민감한 신경을 건드리는 것으로, 룩셈부르크가 외국인이 투자한 검은돈으로 이익을 얻었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 금융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은 항상 발전의 최전선에 있었고 다른 국가들보다 빠르게 금융시장에 대한 국제법규를 적용해왔기 때문이다. 거의 반세기 전 룩셈부르크에서 투자 펀드가 등장했을 때 이미 그랬으며 그러나 오늘날 특히 전문 투자자에게 매력적인 점점 더 복잡해지는 금융 상품에 여전히 적용되는 중이다.

2006년 이후 10,000개의 룩셈부르크 펀드에서 관리하는 자산 규모는 1조 8,500억 유로에서 3조를 기록하고 있다.

박동수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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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980년에 독일에 들어와 사는 한국인입니다. 그 당시 독일 광산노동자이셨던 아버지, 간호원으로 일하시던 어머니, 부모님의 가족 초청으로 1980년 독일로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이 대접받는 독일 사회를 이야기하는 공간입니다.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독일과 같이 대접받는 미래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오늘은 부족하여도 내일은 채워지고 조금씩 나아지는 우리 사회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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